“목사님,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훌쩍 가고 싶어요.”

삶의 현실에 자꾸 지쳐갑니다. 사람에게 고통 받습니다. 돈의 부족으로 부지런하게 살아가는데도 힘듭니다. 자녀들도 문제가 생깁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지 자조감이 깊어집니다

세상 살이가 많이 힘듭니다.

교회의 주일 예배에서 대표 기도하는 분들이 다른데도 그분들이 쓰는 공통적인 문장이 있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지치고 찢긴 심령이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위의 고백들 우리 모두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전에 중국에서 조선족 성도가 모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대표 기도를 하는 분의 기도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에도 이 험한 세상에서 지치고 찢어진 심령들이 오늘도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한국 교우들이 하는 기도와 너무나 똑같았습니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힘들고 지친 현실인 것을 알기에 공감이 확하게 왔습니다.

켄터키 주에서 공부할 때 미국 교회에 잠시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중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분들이 모인 아주 괜찮은 크기의 교회였습니다. 화려한 시설, 체육관, 교육관 그리고 주차된 차들이 그 분들의 삶의 수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날 주일 대표 기도하는 아주 멋진 노신사의 기도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During last 7 days out heart and soul have been broken into pieces in this troubled would-지난 7일 동안 이 괴로운 세상에서 우리의 심령이 갈가리 찢어졌나이다.” 놀랬습니다. 저들은 지칠 환경,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이 아닌데도 그렇게 잘사는 분들이 모인 교회의 대표 기도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땅에 사는 인생에게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옵7:1)

한국 이민 사회,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회, 미국의 비버리 힐즈의 사회나 괴롭고 험한 세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한국이기 때문에 힘들고, 미국은 미국이기 때문에 험합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인들 괴롭고 고통스럽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심령이 찢어져 나가는 것은 미국, 한국, 아프리카 똑같이 힘든 세상입니다.

가난한 자는 가난하기 때문에 괴롭고, 못 배운 자는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롭고, 배운자는 배운 것 때문에 힘들고, 높은 자는 높기 때문에 그 심령이 괴롭습니다. 시체가 되어 땅속에 두러누웠다면 모르되, 이 땅에 살아 있는 인간치고 그 심령이 지치고 찢어지고 괴롭지 않은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세상이 힘들고 지치고 어렵습니까?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하루하루 죽어가는, 노하고 쇠하여 가는 유한한 존재, 비극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괴롭이요 슬픔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고통이 있다는 것은 참된 위로가 필요한 까닭이지요. 교회가 필요한 존재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목표 중의 하나입니다. 목사가 필요한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지가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요11:18-19)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 죽음은 가족에게 큰 위협이 됩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오빠가 유일한 경제적 힘인데 마르다, 마리아 이 자매의 앞날은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홀로 남은 마르다, 마리아를 방문했습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요?

우리에게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그 분이 목사가 되어야 하고,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서로가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힘들고 괴로운 험한 이 세상에서 심령이 지치고 찢어지는 아픔을 감내하기에는 그 고통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위로룰 구하고, 또 누군가를 위로해 주기 위해 나섭니다.

한 주일 예배가 끝나자마자 점심 친교도 하지 못하고 한 형제의 병원에 손살같이 달려갔습니다. 우리 부부의 방문이 그 부부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가정에 힘들 때에 성도들은 제일 먼저 목사를 찾습니다. 특별히 심각한 병에 이르렀을 때는 목사를 정말 간절하게 찾고 기대합니다.

한 권사님이 저에게 이런 예약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죽으면 목사님이 장례 예배 집전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니 목사님 건강하셔야 합니다.”

목사가 뭐라고 위로가 되겠습니까?
연약한 인간임에도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위로가 되는 것이겠지요.

가끔 강조하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시점에 도움을 요구할 수 있는 목사님 한분은 꼭 만나셔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다는 확신의 목사님 한 분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과 가정에 깊숙이 개입한 목사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어려우면 찾을 분이 목사님 밖에 없다고 하는 이유를 그런 어려움 겪지 않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내 문제를 피상적으로 아는 교회가 아닌 진심으로 내 문제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교회를 다녀야 합니다. 숫자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진정한 공동체 위로를 주는 성도들의 만남 말입니다. 그래서 내 교회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다니는 교회가 당신에게 그런 교회가 되고 당신이 바로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12:26)

참된 위로란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 현실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 그 현실을 수용하고 극복케 하는 힘입니다. 참된 위로란 후유증 없이 인간의 내적 고통을 치유해 주는 능력입니다. 결국 믿음의 동역자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위로자의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가 이런 위로의 공동체가 되도록 당신 역활 충실하게 했으면 합니다.

(양목사의 주님과 하루 함께 살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