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내가 속해 있는 이곳이 ‘광야’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광야 교회’라고 부릅니다.

종종 ‘광야에서’라는 찬양을 듣습니다. 특별히 김윤진이라는 찬양 사역자가 부른 노래가 좋아서 그 자매의 노래를 듣습니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내가 광야라는 곳에 있는데 지금까지 보지 못한 ‘낮선 나’를 봅니다.

광야는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자신에 대해 새로운 시각, 정의를 내려줍니다. 나의 상식, 나의 신념, 나의 욕망의 현주소를 있는 그대로 보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평가하도록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광야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라옵니다. 모든 인간적 경험과 가치관이 광야에서는 전혀 쓸모 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나를 평가 해 주었던 것들이 철저하게 무너집니다. 믿고 있던 것들이 무력함을 경험케 해 줍니다.

찰스 커밍스가 말합니다. “고통이 우리 영성에 미치는 즉각적인 효과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제대로 일깨워 준다는 점이다.” 그 고통을 우린 광야 교회에서 경험합니다. 바울은 광야 교회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스스로 버렸습니다.

그래서 광야를 난 새롭게 태어나는 신자의 보금자리라고 부릅니다.

광야에서 겪는 고통은 내 자존심의 열매인 피땀 흘려 세우고 조심스레 유지하고 있는 내 자아의 모래성을 와르르 무너뜨립니다. 고통의 정도가 심각할수록 모래성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나를 맨몸으로 광야의 태양과 비와 바람에 노출시킵니다.

최고의 기독교 변증학자인 CS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나 사랑의 자질을 알아보시려고 시험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신다. 모르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피고석과 증인석, 그리고 재판석에 모두 한꺼번에 앉아 볼 수 있도록 만드신다. 그분은 언제나 내 성채가 카드로 만든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쳐서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

광야에서 내가 배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없어도 되는 것이 많이 있지만, 없으면 절대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충분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인해 이제 내 자신을 은혜로 보니 매우 낮설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가진 자원, 가능성, 주위의 평판으로 자신을 정의(익숙하던 학벌, 돈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물질 의존성, 교회의 성장에 매달림, 사람에 대한 기대감)하는 그런 자신을 의지하던 삶에서 떠납니다.

그 대신 넘치는 사랑으로 자신을 상대해 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관점에서, 그리고 질그릇 같은 자신을 거처로 삼아 주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나의 새로운 존재 의미를 새롭게 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날 보니 매우 낮설어 봅니다.

이런 익숙함에서 주님쪽으로 가는
한번도 서보지 못한 광야에 서서 날 바라보면 매우 낮설어 보입니다.
이게 광야의 삶입니다.

낮설은 나를 보는 것도 황홀합니다.
당황하는 내 모습 보기 좋네요.

(양목사의 주님과 하루 함께 살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