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교적 판단이 빠르고, 논리적인 편에 속합니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문제이든 빨리 이해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교우들보다 빨리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습니다. 또한 의견이 부닥칠 때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것이 맞네요!’하며 공감을 해 줍니다.

 

그럴때마다 이런 내 판단과 논리적인 접근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이 하나님이 제일 많이 손대는 편입니다. 빠른 판단과 논리적인 말 솜씨가 하나님의 일에 장애물이 되어서 평생 이것을 하나님이 만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기에 내가 은사라고 생각하는 비평, 분석, 논리를 손대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묵상하면서 그의 공감 능력에 한 수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눈물의 예언자인데, 그의 눈물은 유다 백성과 동일시하는 공감에서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이든 판단을 유보하려 합니다.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하더라도 감각적인 것을 갖고 공감하려 애를 씁니다. 사람, 상황 이해하려고 늘 노력합니다.

 

요한복음을 설교하면서 가장 중대한 강조인 요5:24절은 영생 얻는 조건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일3:14절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상반대되는 주장을 합니다.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요한이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헤갈릴 이유가 없을 텐데 왜 구원의 조건을 사랑으로 제시했을까요?

 

오순절 사건 이후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그런 교회를 향해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원의 은혜를 누린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이상한 일,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믿었다면 그 사랑 때문에 자기 역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말을 ‘사랑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말로 바꿔 쓴 것입니다. 요한에게 믿음은 사랑과 동의어였던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늘 안타깝고 답답한 것은 내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가치와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실제로 내 삶에서 사랑이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논리, 분석, 옮고 그름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고, 교회 생활도 그런 눈길에서 하고 있습니다.

 

분명 성경은 사랑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증거라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인데 사랑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직 그 삶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건 아주 심각한 반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큰 죄라고 하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지키지 않는 것이 두개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인정하지 않고 믿음 생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범죄인데 여전히 우리는 사랑보다 다툼, 옳고 그름에 점을 찍는 신앙 생활을 합니다.

 

사랑하세요.

또 사랑하세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 것입니다.

 

(양목사의 주님과 하루 함께 살기에서…6/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