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좀 믿어주자(3)-

(올해에 이것은 반드시 고치자는 취지에서 신년 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꼼꼼하게 읽어주고 교훈을 받으면 한편의 설교 이상으로 이 글들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충 읽지 말고 차분하게 나에게 적용하면서 읽어주세요.)

 

난 악기를 다룰 줄 모릅니다.

단지 기타를 좀 칠 뿐입니다.

그런데 듣는 귀를 많이 훈련했습니다.

켄터키에서 공부할 때는 오페라 CD를 사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악, 합창을 많이 들어서 좋아합니다.

 

미술도 그릴 줄 모릅니다.

그런데 미술 작품을 유심히 보려고 애쓰고 화가들의 이름을 기억하려 나름 노력했습니다.

특별히 ‘고흐, 고갱’과 같은 고윤호 ‘고’씨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에 여행 갔을 때에 미술관에 그들의 그림을 다 사진으로 찍어 놓았습니다.

 

미술에 조예가 있는 김미경 권사 혹시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카라바지오’ 아세요? 

 

‘카라바지오’는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미켈란젤로’였지만 자신보다 앞선 위대한 조각가요 화가였던 ‘미켈란젤로’의 그늘에 가려

자신의 이름 대신 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이름인 ‘카라바지오’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어쩌면 너무 유명한 사람과 같은 이름이기에 그의 천재성이 묻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카라바지오’의 ‘의심하는 도마’라는 그림을 보고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 도마앞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는 예수님께서 도마의 손을 잡아끌어 자기의 상처에 대어보이는 예수님의 손이 한 가운데 힘주어 그려져 있습니다.

 

난 그 상처가 도마의 의심에 의한 주님의 상처라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20:25)

 

‘카라바지오’는 자신의 세계관으로는 절대로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자신의 눈 앞에서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게 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하려는 의도로 이 그림을 그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마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십자가에서 상처난 부분을 보여주고 직접 도마의 손으로

만지게 해서 의심을 풀어주려 했습니다.

‘카라바지오’의 뛰어난 상상력입니다.

 

이 정도면 아무리 의심스러운 도마라 하더라도 안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의심이 얼마나 우리 삶을 파괴하는지 난 경험적으로 압니다.

특별히 사람에 대한 의심은 그 사람을 모든 사물을 의심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민 목회를 하면서 사람에 대한 배신과 상처가 크기에 내 마음 속에 사람에 대한 의심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심이 많은 도마가 예수님에 대한 의심을 걷고 자신이 믿지 못했던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거나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큰 의미를 제공합니다.

의심이 사라진 삶은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또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그 사람을 의미있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주변에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날 믿어주는 사람이 내 주변에 많이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안정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이거 아세요?

역설적으로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믿어 줄 때에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내가 의심을 하면 내 주변에 의심많은 사람만 있게 됩니다.   

 

예전에 한국의 어느 대통령이 국민들을 향해서 한 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당시 군부 정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기에

대통령이 국민에게 의심하지 말고 믿어달라는 이 이야기는 코메디언들도 방송에서 자주 사용했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기에 설명이 많았습니다.

불신 사회에는 설명이 많습니다.

모든 일에 다 설명이 들어가서 설득을 해야 합니다.

 

이거 참 불편합니다.

아니 피곤합니다.

믿어주어야 하는데 안 믿어주니 다 설명을 하니 얼마나 피곤합니까?

 

우리는 믿지 못하는 불신의 사회로 인해서 서로에게  

믿음보다 의심부터 하는 분위기에 익숙해졌습니다.

이 불신이 교회에 들어와서 목사의 설교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믿지 못하니 다른 것은 오죽하겠습니까?

 

목사님들이 힘들어 하는 것이 믿어주지 않고 다 설명해 달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왜 그런 행동을 하셨습니까?

그 재정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 하나 설명을 요구하고 또 요구하는 그런 분위기 얼마나 살벌합니까?

 

물론 정당한 불신, 회의는 삶에서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우리 교회가 내 아픔을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인가?”

“우리 목사님이 어떤 경우에도 나를 지지해 주는 신뢰하는 목사님인가?”

 

그런데 너무 심하게 불신하면 그 불신이 부메랑되어서 나를 힘들게 합니다.

내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뭔가 아닌 것같고 의심스러울 때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그 느낌은 불안감이고,

의심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지오’가 그린 그림 ‘의심하는 도마’를 통해서 그가 우리에게 하고픈 이야기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의심으로 가득찬 도마에게 ‘의심보다는 믿음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믿어주는 소중함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믿어주자입니다.

 

이 땅에서 설명이 필요없고 나를 믿어주는 공동체가 가족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언제든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가족이 있기에 늘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가족이란 이렇게 서로를 믿어주는 곳입니다.

이 믿어주는 것이 깨지면 불신으로 가족이 깨어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믿어주는 공동체입니다.

내 주변에 나를 어떤 상황에서도 최종적으로 믿음으로 지켜봐주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삶에 대한 용기를 줍니다.

서로 믿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불신의 위기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동역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소망이 됩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올 한해 의심보다는 신뢰를 택했으면 합니다.

서로가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해도 오해하지 않고 넘어가는 ‘여백의 교제’가 있었으면 합니다.

너무 꼬장꼬장하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하면서 의심의 눈과 마음을 좀 멀게 가졌으면 합니다.

이제 서로를 알 만큼 알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 세월을 통해서 경험한 학습이 불신보다는 믿음이라는 것을 이제 압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9)

 

(양승원 목사의 주님과 하루 함께 살기에서…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