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의 양단 치마 저고리

서울에서 1950년 12월 중순에 중공군의 남침으로 인해 피난으로 외갓집이
잇는 평택군 팽성면 노와2리에 피난 보따리를 풀고 보니 늘 따라붙는 별명
서울 피난민 이였다. 1953년 7월 휴전이 되고도 서울의 집이 포격으로 완전
히 날라 가버려서 만부득히 피난민 신분에서 정착민으로 바뀌었다.
그곳에서 집도 사고 논과 밭도 사서 농사를 지으니 아버님은 공무원 신분에서
농삿군이 되섰고 나는 서울과 동두천을 오가며 지내다가 1957. 6.에 해병대에
지원 입대를 하여 진해시에 있는 해병보급정비단 에서 군복무를 시작하였다.
1958.10월경 모처럼의 휴가로 집에오니 서울살림이 아닌 농사일에 여름내
더위와 싸우며 찌든 부모님의 모습을 보는것이 다 나의 잘못인것 같아 마음
한구석을 도려내는듯 괴로웠다. 군복무만 아니면 괸찮은 직장에서 돈도 꽤 
벌었는데 하고. 며칠지내는 동안에 작은 외숙모가 나에게 묻는것이 휴가 선물
로 어머니에게 무엇을 드렸냐고 묻는것이였다. 그래서 쫄병이 선물을 살돈이
어데 있냐고 했다. 그다음 외숙모의 말이 군에 가기전에는 너와는 비교도 안
되든 이웃에 '그복' 이는 휴가도 자주 오는데 올적마다 자기 어머니와 가족들
옷감은 물론 당시에는 제일 좋다는 양단도 사왔다고 하시며, 육군보급 부대
에서 근무 하니 그렇다고 한다며, 너도 해병보급부대 인데 왜 맨손으로 왔느냐
고 하시며 다소는 의문이 섞인 표정을 하셨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쫄병의 월급
이 당시에 '아리랑' 이라는 담배 2갑 정도인데 부정을 하지 않고서야 그럴수가 
없다고. 당시에는 부정부패가 사회전반에 만연하여 군대 에서는 식량의 주식인
쌀 까지 내다 팔아서 나부터도 배고픔에 시달렸다. 일주일의 휴가를 마추고 
귀대하며 나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다. 나도 어머님께 양단 치마저고리 옷감을
선물 하겠다고. 문제는 돈인데 부정을 하지않고는 불가능이었다. 그렇다고
부정을 할수는 없었다. 만기 제대 까지는 한 20개월이 남았으니 그 기간동안에
돈을 모으기 위해 담배,건빵,치약,치솔,세탁비누등의 개인에게 지급되는 소모
품을 아끼고 팔아 모으고 간혹 명절이나 연휴일에 상급자들이 주는 보너스
성격의 기밀비를 아껴 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보낸 1년 많이 힘들었으나 목표치
의 절반도 못미치고 짠돌이라는 주위의 손가락질만 얻었다. 문제는 담배와 건빵
이었다. 그전에는 내가 담배를 피우지않아 동료들에게 나누워 주었는데 어느날
부터는 상급자 들의 몫 까지 내가 차지 하였으니. 불평과 불만이 선임하사와
과장에게까지 알려저서 늘 근무성적과 모범사병 이라고 했는데 사무실내의
분위기를 깨는 주범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휘관 담화시간에 과장과
선임 하사 입회 아래 무슨 개인적인 문제라도 있느냐고 묻기에 솔직히
말하였다. 그 말이 부대장에게 보고 되고 800 여명의 대원이 알게되여
쉬웁사리 어머니가 기뻐하실 양단 치마저고리 옷감을 싸들고 자랑스럽게
짧은 휴가를 다녀오고 어머님이 기뻐하시는 사진도 한장 부대에 전했다.
이후 6개월 정도 지나 만기 제대를 하여 집에 돌아왔고 어머니의 양단
치마저고리 입은 모습이 보고 싶었으나 아무 말도 없으시여 묻지않고
새로운 직장이 있는 동두천 에 와서 있고 살았다. 어떤 기회에 어머니에게
물었다? 양단 치마저고리는 새로 10벌 이라도 살수 있으니 아끼지 말고
입으시라고. 순간 어머니가 눈가에 이슬이  맺희며 아들아 미안하다 하시며
실은 옷감이 중국양단 이 아니고 일본에서 만든 인조 양단이라고도 하고
(가짜 양단이라고)하는데 불(뜨거운)앞에 가면 않되는것을 모르고 부엌에서
입어 오구라 들어서 곧 못입게 되었다고 하시며,남자들이 옷감을 사러가니
속여서 그렇게 된것이라고 하시며 그래도 마음에 담고 살았다고 하신다.
어머니 날을 맞아 선물할 어머니 가 있으신 당신을 축하합니다. 
Jr.김삿갓 5-18 어머니 주일에.